끝나지 않는 전쟁 (팔레스타인-이스라엘 1)
국제사회의 우려표명, 미 대통령 바이든의 '도를 넘었다'는 경고에도 불구 이스라엘 네탄야후정부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최남단이며 이집트와의 접경지로 가지지구의 230만 인구 중 140만이 피난 와 마지막 민간인 피난처로 알려진 라파지구에 대한 대대적 공습을 지난 8일 강행했다.
사망자는 100여 명의 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고, 이 여파로 국제유가는 상승하고 있다.
작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대규모 로켓공습을 감행하며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이스라엘이 대규모 반격 및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를 4개월간 진행해오고 있는 상태이며, 지난 11월 이후 하마스와 연합한 에멘의 후티 반군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철수를 명분으로 홍해를 봉쇄하고 아시아와 유럽의 통로인 수에즈를 막고 있는 실정이다.
추가로 이란등이 개입하면 다시 중동전쟁으로 확전 될 가능성이 높아 2024년 세계 경제포럼에서 논의될 지정학적 리스크 중 하나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 왜 이곳은 이러한 갈등이 상존하고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지에 대해 띄엄띄엄 산개한 지식을 모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디아스포라
기원전 1200년경 모세가 이끄는 헤브루인(유대인)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으나 이후 로마와의 전쟁에 패해 국가를 잃고 시계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각지에 집단을 형성하여 살게 된다.
이후 반유대주의가 유럽에 만연하던 1894년 프랑스 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던 드레퓌스 대위의 필체가 파리주제 독일 대사관에서 발견된 문서에 사용된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게 되며 유대인의 '유대국가 건설'이라는 열망에 불을 지피게 된다.
당시 이 사건을 지켜본 유대계 언론인 테오도를 헤르츨은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시오니즘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1896년 '세계 시오니스트 기구'를 설립하고 1897년 '제1차 시오니스트 대회' 개최하는 것을 주도하게 된다.
디아스포라(Diaspora)
특정 민족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기존에 살던 땅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는 것 또는 그러한 집단을 일컬음.
처음 언급, 신명기 28:25, 추방에 대한 내용인 "그대가 이 땅의 모든 왕국에 흩어지고"이다. 히브리어 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 기원전 587-586년 바빌로니아인들이 이스라엘에서, 기원후 70년 로마 제국이 유대 지방에서 유대인들을 쫓아내는 부분에서 디아스포라라는 낱말이 쓰여 이 말이 지금의 의미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디아스포라'는 이스라엘의 유대인 민족 집단이 해외로 흩어진 역사적 현상과 그들의 문화적 발전 혹은 그들 집단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자 영국은 전쟁 자금 마련 및 우호적 여론 형성을 위해 유대인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이를 유대국가를 세울 절호의 기회로 인식한 유대인들은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벨푸어로부터 유대계의 지원의 대가로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이른바 '벨푸어 선언'을 1917년 이끌어 내게 된다.
하지만 이 보다 1년 앞선 1916년 영국의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 판무관 맥마흔은 당시 헤자즈 통치자인 후세인과 '후세인-맥마흔 협정'을 체결하여 아랍국가의 독립과 아랍 칼리프제 구축을 약속하였기에 이러한 영국의 이중적 행보가 이후 아랍과 유대인간의 갈등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영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서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을 밀어네고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고 위임 통치를 시작하였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허용하며 유대 국가 건설을 지원하게 된다. 에에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게 되고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아랍인들과 영통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 통치하던 영국은 1948년 통치권을 돌연 포기하고 UN에 일임하였으나 UN의 중재안이 아랍 및 유대에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해 5월 14일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하게 된다. 이에 아랍 연맹은 곧바로 이스라엘 임시정부에 선전포고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중동전쟁이다.
끝나지 않는 중동전쟁
사실 거의 매일 같이 포탄과 총탄이 날아다니는 지역이라 계속된 전쟁이라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규모면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발생한 4차례에 걸친 전쟁을 중동전쟁이라 칭한다.
발생연도 / 발발일시 | 전쟁 명칭 | 주요교전국 (對 이스라엘) |
1948 ~ 1949 / 1948.05.16 |
제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건국전쟁) |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
1956 / 1956.10.29 |
제2차 중동전쟁 (수에즈 전쟁) |
이집트 |
1967 / 1967.06.05 |
제3차 중동전쟁 (6일 전쟁) |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
1973 / 1973.10.06 |
제4차 중동전쟁 (욤 키푸르 전쟁) |
이집트, 시리아 |
초기 팔레스타인 일부 지역에 유대인이 정착하며 시작된 이스라엘의 거주지는 전쟁을 거쳐가며 점차 커져 유엔의 중재안(Partition Plan) 보다도 훨씬 더 넓어지게 된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에게 점력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계속해서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펴며 지역의 긴장을 고조시킨다.
Partition Plan (분할 안)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 국가, 아랍국가로 분리하되 예루살렘은 국제공동 통치구역으로 두는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통과시킨다. (상기 왼쪽에서 두 번째 지도)
하마스의 결성
1987년 이스라엘 군 차량 사고로 팔레스타인 노동자 4명이 사망하는 사고로 이스라엘의 군의 압제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대대적인 봉기(1차 인티파다)가 발생한다. 이때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가 떨어져 나와 결성된 정치 조직으로 이스라엘이 1차 인티파다를 잔혹하게 진압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89년 이스라엘 병사 2명을 암살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이후 지속적인 무장 투쟁을 시작한다.
오슬로 협정
한편 1988년 11월 15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수장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1993년 당시 미 대통령인 빌 클린턴의 중재로 이스라엘의 재배치와 철수, 팔레스타인 자치와 선거 등을 담은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하지만 1995년 이 협정을 이끌었던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극우파에 의해 암살되고 1996년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자살폭탄 테러 등이 발생하며 이행에 난항을 겪게 된다.
1996년 이스라엘의 극우 강경파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당선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나 미국의 압력에 의해 평화협정에 서명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그는 총리직을 사임하며 실제 2005 ~ 2007년까지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서 철수한다.
그러나 2009년 네타냐후는 다시 총리로 복귀하며 평화협정 이행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우경화되어 가고 가자지구도 2007년 이후 하마스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며, 양측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게 되고 오슬로 협정은 유명무실해졌다.
풀어야 할 숙제들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는 서로 합의치 못하는 여러 쟁점이 존재한다. 가장 첨예하고 근원적인 문제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양국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병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리되면 제1차 중동전쟁 때 발생한 50만 명의 난민 포함 지속된 전쟁으로 가자지구에 2백만 명이상, 요르단강 서안에 3백만 명을 포함 중동지역에 모두 6백만 명의 본인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갈 곳을 찾게 될 것이다. 또한 이리되면 현재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된 서안 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들에 대한 해결 방안도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3개 종교 모두의 성지인 예루살렘에 대한 공유 문제는 지난 1947년 UN의 분할 안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국제 공동 통치구역으로 두는 방안도 좋을 것이다.
여하간 모든 것이 이대로 시간이 흘러 좀 더 고착된다면 풀리지 않고 지워지지 않을 갈등만 남게 될 것이니 국제 사회에서 좀 더 개입하여 또 다른 중동전쟁의 우려가 아닌 지난 어렵게 맺었던 오슬로 협정의 이행이 될 수 있기를 기다려 본다.